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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3 추천 6 01/12 19:27

 1화:읽어조

지난화:읽어조조조 조조조 조조조


──아버지라는 사람이 말이야, 무슨 낯짝으로 인제야 나타난 건지…….”

──으이그, 내가 말했잖니? 애 아빠는 아닐 거래도!”

 

 거리 때문에 내용까지 알아듣지는 못했다. 그런데 어째 다들 내게 곁눈질을 하는 것 같단 말이지. 그렇담 내 얘길 했다는 건데, 끼니까지 미뤄가면서 새삼 뒷담화할 건덕지가 뭐가 있다고 저러시나 몰라? 신경 쓰이네…….

 그렇다고 아주머니들의 수다에 귀를 기울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늦기라도 했다간 엄마한테 된통 혼날 테니까. 엘케인은 호기심을 억누르고 계속해서 걸었다.

 

 무슨 소리야? 그렇게나 똑 닮았는데.”

 너무 젊잖니. 걔만 한 애가 있을 나이는 절대 아냐.”

 

 하지만 주변을 지나가면 못 들을 수가 없지. 그렇게 조금이나마 맛보고 나니 더는 호기심을 이겨낼 수 없게 됐다. 엘케인은 아주머니들 쪽으로 살금살금 걸었다. 정말로 내 얘기를 하는 건지, 맞다면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아내고야 말겠어.

 

 우연히 닮은 사람이 나타났다, 이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어머, 너는 세상에 혈연이 부자지간밖에 없니? 삼촌이거나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형일 수도 있다, 이 말이잖니!”

 

 발육이 느린 편인 엘케인은 아주머니들보다도 작았다. 뒤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소리만 안 내면 끝까지 들키지 않고 엿듣는 것도 가능하겠다.

 

 아이참, 애 아빠가 맞대도!”

 너무 어리다고 했잖니? 잘해야 20대 후반이겠더만!”

 그럼 애는 열넷 즈음에 만든 게 되지 않겠어? 안될 건 없지!”

 어머나, 징그러운 소리 말렴!”

 징그러울 게 뭐 있어? 옛날에는 다 그때 결혼해서 새끼 쳤어!”

 

 ……라는 것은 엘케인 혼자만의 착각이고, 사실은 말싸움이 붙어 흥분한 두 아주머니 빼고는 다 알고 있었다. 얼음처럼 새하얗게 고운 애가 이쪽으로 걸어오는데 그게 어찌 안 보일까?

 그래서 다른 아주머니들은 이제 그만하라고 눈치를 줬다. 하지만 다혈질인 두 사람은 그런다고 말릴 수 있는 성미가 아니었다.

 

 지금이 옛날이니!”

 말꼬리 좀 그만 잡아!”

 

 이젠 고래고래 소리까지 질러가며 서로의 말을 따박따박 반박한다.

 

 옛날에는 흔했다, 그래서 불가능하지 않다, 이 뜻 아냐!”

 너는 말귀나 알아들으렴!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잖니? 세상 어느 집 부모가 애가 애를 낳는 걸 가만두고 보겠니!”

 그럼 생겼으면 낳아야지, 어쩔 건데!”

 

 싸움의 주제가 엘케인과는 관련이 없다는 점만은 다행이었다. 다만, 이 기세면 몸싸움으로까지 번질 것 같달까, 영 불안하다. 아주머니들은 통하지도 않는 눈짓은 그만 보내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엘케인도 덩달아 뒷걸음질을 했고.

 

 요즘에는 말이지, 뱃속 아기가 이렇게 손가락만 할 때 죽이는 방법이 다 있단다.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는데?”

 그게 좋아진 거야? 끔찍해진 거지! 얘는 처녀 적에 도시물 먹고 오더니 머리가 이상해졌다니까?”

 그래, 네가 모르는 건 다 이상한 거지. 하긴, 너 같은 촌닭이 마법에 대해 뭘 알겠니?”

 ? 촌닭? 너 말 다했어?”

 어머, 말 다했냐니? 무식한 년 아니랄까 봐, 촌닭보다 더한 욕은 모르나 보네?”

 

 역시나.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둘은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붙잡았다.

 

 너 이거 안 놔?”

 대머리가 될 때까지 쥐어뜯어 줄 테니까 각오하라고.”

 네 머리는 안 뜯길 거 같니?”

 

 결국엔 한 명이 말리러 나섰다. 희끗해져 가는 갈색 머리카락을 아래로 잘 묶어 동그랗게 만, 중년의 여성이.

 

 두 사람 다 그쯤 하세요.”

 

 아주머니들 사이에서는 왕초 역할을 하는 아라멜라 부인이다. 그녀는 작지만 또박또박 귀에 박히는 목소리로 점잖게 말했다.

 

 점심 먹으러 집에 왔더니 엄마 머리가 산발이 돼 있으면 애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그것만으로도 싸움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아라멜라 부인은 우악스러운 시골 아주머니들을 말만으로도 휘어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비결은 통나무처럼 굵직한 기골이 되겠다.

 

 아무튼, 다음 조치. 아라멜라 부인은 엘케인을 향해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지금에서야 본 척 인사를 건넸다.

 

 엘케인 아니니. 망토가 참 귀엽구나. 꼭 왕자님 같아.”

 에구머니나! 쟤가 언제부터 와 있었을까?”

 

 , 들켜버렸네. 엿들은 거까지는 몰랐으면 좋겠는데……. 엘케인은 뺨을 붉히며 맞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숲은 아직도 춥나 보구나. 야영은 이제 끝났니?”

 아뇨, 아침에요. 집에 혼자 있기 심심해서 놀다 온 참이에요.”

 그랬니. 얼른 집에 가보려무나. 엄마가 널 찾고 계실 거야.”

 

 …… 그야 그렇겠죠, 점심시간에 늦었으니까. 그치만 어째 표정이 의미심장하단 말이지? 꼭 다른 이유가 있다는 듯이. 엘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엘케인!”

 

 제빵사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엘케인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방향이 빵집이 아니네? 이상하다, 차려 먹을 여유도 없어서 팔고 남은 빵으로 대충 때우는 분이 왜 밖에 계시지? 아무튼, 니콜라스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유독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네. 못 보던 까마귀가 나타나질 않나, 형은 느닷없이…… 설마? 에이, 아니겠지. 고작 까마귀 때문에 잘만 지내던 마을을 떠난다고?

 

 허억…… 여기, , 있었구나!”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니콜라스는 바로 앞에 와 있었다. 그것도 기운을 다 쏟아낸 듯,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짚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헐떡거리며.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남은 힘을 쥐어짜 하던 말을 이어갔다.

 

 ! 허억, 허억…… 얼른! 가자! 허억…… 어서! , …….”

 

 숨은 좀 고르고 말씀하시지, 뭐가 저렇게 급한 걸까? 그러나 이유를 물을 틈은 없었다. 니콜라스는 엘케인의 팔을 덥석 붙들더니 다시 달렸다.

 

 , 어어엇……!”

 

 엘케인은 속절없이 끌려갔고.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설명은 나중에!”

 

 엘케인은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나름대로 추리라는 걸 해봤다. …… 내가 정오가 지나도록 집에 안 들어오니까 엄마가 친구인 니콜라스 아저씨께 부탁한 건 아닐까? 같이 찾아달라고. 그래, 그런 거겠지. 별일은 아닐 거야.

 

 

 그러나 도착한 곳은 엉뚱하게도 벨마 부인의 잡화점. 마을 귀퉁이에 있는 후미진 가게다. 인적이 드문 건 말할 것도 없고. 근데 우리 집도 아니고 여긴 왜? 아하, 아주머니께도 도와달라고 했구나!

 

 들어가라.”

 

 , 화 많이 나셨나 봐. 목소리가 싸늘해. 군말 없이 하라는 대로 해야겠다. 엘케인은 순순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발을 들인 니콜라스는 얼른 문을 닫았고.

 

 그런데 이상했다. 가게가 어둡다. 이런 볕 잘 드는 한낮에 창문 셔터를 닫아놓고 촛불만 하나 달랑 켜다니? 저게 구하기 쉬운 것도 아니고, 아무 소용 없는 짓에 무슨 낭비람?

 

 아이는 찾았소?”

 보면 모르나?”

 

 들려온 목소리는 여관 주인 새뮤얼 톰슨 같았다. 옅은 불빛을 받아 어슴푸레 드러난 실루엣도 아저씨와 비슷했다. 세상에, 엄마, 다 큰 아들 하나 찾자고 몇 명을 동원한 거예요? , 설마 아직도 숲에 있다고 생각하셨나? 이런, 셀리 말 대로 얼굴도장을 찍었어야 했네…….

 아무튼, 나 때문에 다들 마음고생 많으셨겠어. 다른 분들도 돌아오시면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앞으로는 늦지 않겠다고 사과해야겠다.

 

 새뮤얼, 전령을 보내도록.”

 

 명령을 내린 것은 아델리나 톰슨이었다. 목소리는 그랬다. , 이번에도 뭔가 이상했다. 두 분 싸우기라도 하셨나? 보통은 애정 어린 말씨로 여보새미라고 부르는데? 말투도 저렇게 딱딱하지 않고.

 그러고 보니 다들 오늘따라 어쩐지 낯설어. 불빛이 어두워서 그런가?

 이상한 일이 점점 늘어만 간다. 고개도 몇 번째 갸웃거리는 건지 모르겠네.

 

 어쨌든, 새뮤얼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은은한 빛의 무리가 떠올랐다. 이윽고 새의 형상으로 거듭나더니, 네 갈래 궤적을 그리며 밖으로 날아갔다. 벽은 그냥 통과해 버리고서.

 

 …….”

 

 아저씨가 마법을 부렸어! 저런 걸 할 줄 알면서 여태까지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거예요? 엘케인은 금방 신이나서는 질문 공세를 퍼부으려고 했다.

 

 아저……!”

 조용히 해라.”

 

 니콜라스의 손에 입이 틀어막히기 전까지는.

 

 허읍……? !”

 

 어찌나 꽉 조이는지 턱이 아픈 건 물론이요, 숨까지 쉬기 힘들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거칠게 다뤄지는 건.

 덜컥 겁이 났다. 낯설었던 게 착각이 아니라면? 안이 어두워서 잘못 본 거라면? 나쁜 사람, 예를 들면 형이 3개월 전에 만났다던 산적들이 벨마 아주머니를 해치고 가게를 차지한 거라면?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이 대낮에 창문이란 창문은 다 닫아놓은 거라면……!

 

 기절을 시키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으아악! 진짠가 봐! 엘케인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발버둥을 쳤다. 그러자 그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델리나의 의견을 따랐다. 니콜라스는 엘케인이 움직일 수 없도록 남은 팔로 몸을 안았고, 새뮤얼은 손바닥으로 두 눈을 덮었다. 그 순간 눈앞이 하얘지더니…….

 

 

 대장!

 ! !

 ──! ──! ──!”

 

 로버트가 부르는 소리에 셀레나는 연습을 멈추고 눈을 떴다. …… 엘케인은 벌써 가고 없네. 이런 말만 잘 듣고 의리는 없는 꼬마를 봤나, 말 걸지 말랬더니 진짜 한마디도 안 하고 가버려? 하여간 순진하다니깐. 셀레나는 피식 웃었다.

 

 그거 언제까지 할 거예요? 우리도 점심이나 먹으러 갑시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냐?”

 

 고개를 치켜올려보니 해는 어느새 하늘 꼭대기. 의식을 해서인지, 아니면 집중이 풀려서인지, 갑작스레 허기가 몰려왔다.

 그런데 정작 먹을 건 없단 말이지. 돈도 없고. 원래는 어제 벌어놨어야 하는 건데, 그놈의 드래곤 사냥 때문에 하루 걸렀더니 알거지 신세다.

 , 나도 내가 무슨 헛짓거리나 하는 건지 모르겠다. 잘못 찾아왔다는 거야 진작에 알아차린 지 오래. 그러면 재탐사하러 가든가, 포기하고 본대륙으로 돌아갈 경비나 벌든가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근데 로버트랑 저놈 사정에 말려들 이 마을이 신경이 쓰여서 떠날 수가 있어야지? 이 쓰잘데기도 없는 오지랖 때문에 신세도 한 번 망쳐놓고서는 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지. 셀레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점심은 어쩌지? 너 돈 있냐?”

 저는 물배나 채우려고요. 강물은 공짜잖아요?”

 

 이러니 내가 외면을 못하지. 하여튼, 생긴 거만 멀쩡하지, 애처럼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라니까.

 

 너는 사지도 멀쩡한 게 굶을 생각부터 하냐?”

 귀찮잖아요. 며칠 굶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그러지 말고, 숲에 가서 사냥이나 하자.”

 또 여우 잡아다 먹이게요? 제발, 세 끼는 무리거든요?”

 네 주제를 알고 편식을 해.”

 저는 그거 또 먹을 바에는 나무껍질을 벗겨다 데쳐 먹으렵니다.”

 그건 내가 무리다. 똥구멍 찢어먹을 일 있냐?”

 

 대화의 흐름만 이렇고 정작 그들이 걷는 방향은 숲이었다. 구걸은 자존심이, 외상은 염치가 허락하질 않는데 달리 어쩌겠는가?

 

 

 그래서, 두 사람은 다시 숲으로 돌아왔다. 아침 안개가 떠난 빈자리는 초여름의 햇살이 그려낸 나무 그림자가 차지했다. 드리운 그늘로는 오늘도 어제처럼 바람이 산들산들 거닌다. 찹찹한 흙내음, 풋풋한 풀 냄새, 그리고 달달한 과육의 향기를 싣고서.

 

 나무 열매는 어때?”

 

 지지난 주에 왔을 때 몇 그루 봐둔 게 있지. 그때는 덜 익어서 열매가 하얀색이었지만, 지금쯤이면 먹음직스러운 보라색이 됐으리라. 셀레나는 두리번거리며 코를 킁킁거렸다.

 한편 로버트는 쪼그려 앉아 나무 밑동을 살피는 중. 그런 곳에 으레 자라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받고, 버섯도?”

 

 따라서 바닥을 굽어보니 과연, 송이송이 피어있다. 흙이라도 묻은 듯 군데군데 얼룩이 진 흰 몸통은 퉁퉁하고, 빵처럼 푹신푹신해 보이는 갈색 갓은 큼직하다. 생김새만큼은 전형적인 식용버섯이다만…….

 

 독 있나 없나 분간할 줄은 알고서 하는 소리야? 그거 잘못 먹으면 골로 가.”

 걱정 마세요, 제 전문이니까.”

 

 버섯이라는 녀석들이 생긴 대로 노는 족속이었으면 세상 어느 바보가 중독돼 죽는단 말인가? 먹고 난 다음에야 분간이 갈 정도로 식용버섯과 비슷하게 생긴 독버섯이 그렇게나 많다고 들었다. 요컨대, 어설픈 지식으로 덤빌 놈들이 아니라는 거지.

 

 다들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뜯어먹다가 죽는다니까?”

 대장, 그런 초짜들이랑 저를 같게 보시면 곤란합니다?”

 

 그걸 모를 놈이 아닐 텐데, 저건 또 무슨 자신감인지……. 하지만 로버트는 기어코 버섯을 땄다.

 

 이거 맛있는 거예요. 구우면 고기 맛 나거든요?”

 너 혼자 먹고 죽어라. 난 오래 살고 싶다.”

 나중에 달란 소리 마세요? 기회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리곤 마법으로 불을 피워 지긋하게 굽는다. …… 냄새도 그럴싸하네. 요즘 독버섯들은 제법이구만.

 

 ──! 이래서 버섯을 숲의 고기라고 하는 거지.”

 

 구운 버섯 하나를 쩝쩝거리며 해치운 로버트는 약을 올리려고 작정한 건지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댔다. 그리곤 보란 듯이 능청을 떨며…….

 

 하나 먹어도 안 죽은 거 보니까 독이 없는 게 맞나 보다. 그럼 안심하고 더 먹어볼까나.”

 

 ……다음 버섯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무시해버리고 열매나 따러 가면 되는 건데, 하도 맛있게 먹으니까 눈을 떼지를 못하겠다. 그래서 입맛만 다시며 구경하다 끝내는 수작에 넘어가고 말았다.

 

 진짜 독 없는 거 맞지?”

 대장도 참, 속고만 사셨나? 안 죽어요, 안 죽어.”

 그럼…… 한 입 줘 봐.”

 

 로버트는 히죽거리며 버섯 하나를 집어다가 셀레나의 입에 들이밀었다.

 

 , 대장, ──.”

 

 먹여주겠다고? 아니, 이 자식이 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무슨……. 셀레나는 뺨을 붉히며 툭 쏘아댔다.

 

 , ‘. 내가 애냐?”

 

 그리곤 버섯을 채가 얼른 입에 넣었다. 근데 막상 거절하고 나니 후회되네. 보는 눈도 없겠다, 까짓거 한 번은 받아먹어 보는 건데 좋은 기회를 놓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야? 얼굴이 한층 후끈하게 달아오른 셀레나는 괜히 화를 냈다.

 

 고기는 무슨, 그냥 버섯 맛이구만!”

 

 그러면서도 더 달라고 손을 내밀었고.

 

 대장은 혀부터 단련하셔야겠습니다?”

 

 로버트는 순순히 버섯을 넘겼다. 가장 실하고 잘 구워진 것으로. 그걸 받아든 셀레나는 먹기 전에 할 말을 쏟아냈다.

 

 우리 같은 떠돌이는 미각이 발달돼 봤자 고생만 해.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주워 먹을 수 있는 막입이 낫다고.”

 

 그러고 나서야 오물오물. 반면 로버트는 말하는 김에 겸사겸사 씹었다.

 

 어허! 미각이라는 건 말이죠, 대장, 먹어도 되는 건지 아닌 건지를 분간하려고 있는 거예요. 맛있는 건 먹어도 되는 녀석들인 거죠. 생명체는 그런 식으로 진화해 왔다고요.

 그런데 맛없는 걸 못 느끼고 계속 먹는다? 그러다 위아래로 콸콸 쏟으면서 죽습니다? 사인, 식중독. 쉰 줄 모르고 먹음.”

 

 용케도 흘리지 않고 먹네. 수다쟁이로 살려면 저 정도 재주는 있어야 하는 거로구나. 셀레나는 입안을 깔끔하게 비우고 나서야 대꾸했다.

 

 이름도 모르는 버섯 주워 먹는 너보단 내가 안전하다, 인마.”

 

 그러고는 다음 버섯을 집어다 한 입 작게 베었다. 그래야 얼른 삼키고 돌아올 대답을 받아칠 것 아닌가. 반면에 로버트는 한 개를 통째로 쏙 넣더니 우걱우걱하면서 제 할 말을 했다.

 

 이건 포르치니라는 건데요?”

 방금 지어냈지?”

 유명한 버섯인데. 견문이 좁으시네.”

 막입인 내가 뭘 알겠냐?”

 

 이런 식이다 보니 속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셀레나가 겨우 세 개를 먹을 사이 로버트가 남은 버섯을 다 해치워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부족하다는 듯, 로버트는 입을 쩝쩝거리며 바닥을 훑었다.

 아쉬움을 느낀 셀레나도 버섯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뵈는 건 이름 모를 잡초뿐. 그런데 로버트는 그 한 무더기의 풀을 콕 집어 지목했다.

 

 그러면 생풀을 먹을 수 있다는 것도 모르시겠어요?”

 

 상상 초월의 먹성이다. ‘귀찮으니까 굶겠다.’, ‘맛없어서 먹기 싫다.’는 말이 저 입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를 않네. 아무튼, 셀레나는 질색했다.

 

 미쳤냐? 난 토끼가 아니거든? 나무 열매나 먹자니까? 그건 독도 없고 새콤달콤 맛도 좋아.”

 그거 가지고 어떻게 배를 채워요?”

 풀은 양 많냐?”

 많죠. 소나 말은 우리보다 몸집도 큰데 풀만 먹어도 잘만 살잖습니까? 반면에 열매 먹고 사는 애들 크기를 생각해 보세요. 다람쥐, 토끼, , 여우…… 다 작잖아요?”

 

 그럴싸한 이론이네. 하지만 먹어본 사람으로서 풀은 결사반대다. 썩 좋은 경험이 아니었거든.

 

 내가 아무리 막입이어도 그건 안 돼. 얼마나 쓴 줄 알아? 그걸로 국 끓여 먹었다가 토하는 줄 알았다!”

 그럼 절충안. 대장은 나무 열매 따 오세요. 저는 풀 뜯어놓을 테니까. 섞어 먹읍시다. 이른바 샐러드!”

 

 저게 어떻게든 풀을 먹이고 싶은가보다. 에휴, 그래라, 그래. 너랑 실랑이하느라 소모될 기운이 아까우니까 져준다. 먹는 시늉만 하고 말아야지.

 

 쓴맛 덜 나는 걸로 엄선해 놔라. 난 잘 익은 걸로 따올 테니까.”

 !”

 

 

 역시 이건 미친 짓이야. 일단 비주얼이 꽝이다, . 셀레나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사람 먹으라고 버무려 놓은 게 아닌데? 우리가 인간의 존엄성을 버려가면서까지 저걸 먹어야 해? 지금이라도 여우 잡자, ? 아니면 새나 토끼는 어때? 내가 오늘은 기필코 잡고 만다. 맡겨만 줘라!”

 

──꼬르륵…….

 

 대장님 뱃속 거지들은 저거라도 달라는데요?”

 너네 식구들은?”

 

 로버트는 손을 귓가에 가져가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대뜸 숙였다. 배 소리를 듣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그리곤 한마디.

 

 “‘숙녀 먼저.’라는군요? ── 신사로다!”

 말은…….”

 

──꾸륵, 꼬로록!

 

 엣흠……!”

 흐흐흐, 얼른 달라고 재촉하는 것 봐. 대장네 거지들은 참을성이 없네요.”

 

 그래, 먹는다, 먹어. 사냥을 하더라도 주린 배부터 채우고 봐야지, 이렇게 시끄러워서는 허탕만 치겠다. 셀레나는 보비와 셀리의 특제 샐러드를 한 움큼 집어다 입에 넣고 씹었다.

 , 맛이…… 열매로 중화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데? 맘 같아서는 뱉어내고 싶다만, 그건 예의가 아니니까 참는다. 셀레나는 억지로 삼켰다.

 후우, 이제 시식평을 남겨야겠군.

 

 네 말대로면 소랑 말은 이따위 걸 맛있다고 느끼도록 진화한 거냐?’

 

 ……라고. 그런데 목소리가 안 나온다, 마비라도 당한 것처럼. 셀레나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렇지, 독은 버섯에만 있는 게 아니지! 저 자식이 기어코 사고를 쳤구나!

 

 , 약효 직방이네.”

 

 실수가 아니야? 고의라고?

 

 몸으로 느끼고 계시겠지만, 대장이 먹은 건 독초입니다. 죽을 정도로 독하지는 않으니까 너무 걱정은 마시고. 잠깐 산림욕이나 하면서 푹 쉬시면 돼요.

 제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시겠죠? 그러면 시간도 남겠다, 설명을 해볼까요.”

 

 로버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눈꺼풀이 무거워…….

 

 대장님은 그동안 저한테 잘해주셨으니까 특별히 살려드리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으셨죠? 마비가 풀리고 나면, 여기서 있었던 일은 전부 잊고 떠나세요. 저런 하찮은 마을은 그만 신경 쓰시고.”

 

 의미심장한 말만 잔뜩 늘어놓는 게 해명이냐? 셀레나는 로버트를 노려봤다. 그게 마비된 몸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항의였기에.

 

 기회가 되면 또 뵙고 싶지만, 그러지 않는 편이 대장에게는 좋을 테니까 이렇게 말해야겠네요. 우리 다시는 마주칠 일 없게 합시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어딜 가? 그건 너 혼자 이겨낼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돌아와!

 셀레나는 이를 악문다던가, 눈을 부라린다던가, 아니면 씩씩거린다던가, 하여간 화난 사람이 할 법한 비언어적 표현을 전부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독에 굳어버린 몸으로는 무엇 하나 되지 않았다. 로버트의 발소리만 점점 멀어져 갈 뿐.

 

 마침내 눈꺼풀이 완전히 감기고…… 그녀의 의식은 망각의 베일 너머, 꿈의 저편을 향해 나아갔다.

 

 

──깍 까악 까악, 깍 까악, 까악 깍 까악, . 깍 깍 까악, 깍 까악 까악 깍!

 

 거참 스산하게도 운다, 재수 없게스리. 그런데 이상하군. 소대륙에 까마귀가 살던가? 걔들은 북반구에만 서식하지 않아?

 

 도움이 필요한가?”

 

 이번에 들려온 것은 낮고 건조한, 누군지 모를 남성의 목소리. 아 역시, 주인 있는 새였어.

 

 그보다, 도움이 필요하냐니, 당연한 걸 질문이라고 하십니다. 나동그라진 꼬라지 보면 몰라요?’

 

 ……라고, 셀레나는 툴툴거렸다. 그러나 빈정거림은 생각에만 머무를 뿐. 입을 뻥긋하기는커녕 눈꺼풀 하나 들어 올리지 못하는 상황인데 말이 나올 턱이 없지 않은가.

 

 나를 믿을 수 있겠나?”

 

 식은 빵 데운 빵 가릴 처지겠어요? 믿으니까, 마을까지만 데려다줘요. 은혜는 갚을게.’

 

 , 이건 너무 시건방졌다. 나 같으면 안 도와줘, 이딴 식으로 말하면. 하지만 생각만 했고 내뱉은 적은 없으니까 괜찮겠지.

 ……가 아니지, 괜찮지가 않지! 대꾸 안 한다고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 다급해진 셀레나는 굽실거렸다.

 

 저기요, 제가 그쪽을 무시해서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마비 때문에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거거든요? 저는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가련한 여인입니다. 제발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하지만 이조차도 생각에만 머무르니 갑갑할 노릇.

 

 그렇다면, 내게 몸을 맡겨보도록 해.”

 

 그거참 표현이 야릇하네요. 아무튼, 도와주시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었는데, 이거 묘하게 대화가 이어지네? 기분이 이상한걸.

 

 마을까지, 걷도록 하지.”

 

 이상한 기분은 곧 불쾌감으로 바뀌었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듯한, 그런 꺼림칙한 감각으로.

 잠깐…… 느낌만 그런 게 아닌데? 나 진짜로 걷고 있는데? 뭐야, 이거 왜 이래? 멈춰, 멈춰!

 

 염려하지 않아도 좋아. 의식이 돌아오면 돌려주겠다.”

 

 몸이 내 말을 안 들어! 이거 설마 그거냐? 정신 지배? 씨발, 내 몸 가지고 무슨 짓을 할 작정이지?

 

 해독을 위해, 네 몸에 잠시 들어왔을 뿐이다.

 정 싫거든, 어서 깨어나도록 해. 스스로 독을 이겨내는 것이다. 할 수 있겠나?”

 

 몸을 맡겨보라는 게 이런 뜻이었어? 순 사기꾼 새끼 아냐? 무효, 무효! 치료도 필요 없어. 내 몸 당장 내놔!’

 

 셀레나는 아우성쳤다. 하지만 이조차도 생각에만 머무를 뿐.

 

 

 섬광에 이끌린 의식은 꿈의 너머에 드리운 어둠을 향해 나아갔다. 현실과는 아득히도 멀리 떨어진 곳, 그러면서도 두 꺼풀 바로 아래에 존재하는 겹쳐진 세계로.

 모든 게 칠흑처럼 검었다. 언뜻 보면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것만 같다. 하지만 여기에 도달한 모두가 안다. 내게 익숙한 것들로 가득하다는 걸. 그래서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는 걸.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어. 손에 닿는 것에서부터 닿지 않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내 것이고 또한 라는 걸.

 

 여기는 영혼의 깊은 곳, 무의식의 너머, 감정이 비롯되고 생각이 비롯되고 의지가 비롯되는 곳. 세계의 세 번째 레이어, 다름 아닌 마음이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자기 안의 현자와 독대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를 벗어나는 순간, 나는 그와 나눈 모든 대화를 잊겠지. 여기를 다녀갔다는 것조차 망각하고 잠깐 거쳐 간 꿈만을 기억하겠지.

 하지만 결론, 그 한 가닥만큼은 가져갈 수 있을지도 몰라. 세간에서는 직감이나 영감 혹은 예감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그래서 엘케인은 있었던 일을 되짚어봤다. 그랬는데도 영문을 모르겠다. 설마하니 정말로 강도일 리는 없잖아. 니콜라스 아저씨는 밝은 곳에서 봤는걸. 내 추리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그치만 그분들이 왜 내게 그런 짓을?

 

 풀리지 않는 의문에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스산한 울음소리가 엘케인의 뇌리를 꿰뚫고 들어왔다.

 

──깍 까악 깍. 깍 깍 까악. 까악 까악 까악, 까악 깍 까악!

 

 또 까마귀네? 그것도 공터에서 본 녀석. 어떻게 알았냐면, 눈이 회색이거든.

 …… 돌이켜보면 너와 만나고 나서부터 이상한 일이 마구 쏟아졌단 말이지. 듣기로는 네가 흉조라던데, 미신이 아니었구나?

 그런데 넌 어떻게 여기 있니? 여긴 나만 올 수 있는 곳인데? 엘케인은 고개만 갸웃했다. 새에게 물은들 대답이 돌아올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까마귀는 까옥거렸다.

 

 손이 많이 가는 꼬마로군.

 잠깐 다른 곳에 다녀온 사이에 이 꼴이 되다니.”

 

 그것도 사람처럼. 이번에는 소리를 내지 않을 수가 없겠다.

 

 으악? 까마귀가 말을 한다!”

 앵무새가 그러하듯이, 충분한 훈련을 받으면 까마귀도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

 말을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닌, ‘유창하게한다는 점에 놀라도록 해.”

 

 놀라는 것도 네 기준을 따라야 해? 깐깐하기도 해라.

 ……. 까만색, 깐깐……. 몸이 깜깜해서 성격이 깐깐……. 하핫, 여기는 이런 게 단점이야. 생각이 너무 잘 돼서 아무 생각이나 다 든다는 거.

 

 끔찍한 농담이었다. 입 밖에 내놓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어?”

 왜 아니겠나?”

 

 발가벗겨진 기분이야.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지는걸.

 

 할 수 있다면 해보든가.”

 

 내가 못 할 것 같아? 아무 생각도 안 하기…… 아무 생각도 안 하기…… 아무 생각도 안 하기…….

 

 잠깐, 지금이 새랑 기 싸움이나 할 때야? 저게 사람 말도 유창하게할 수 있고 생각도 읽을 수 있는 비범한 까마귀라면, 형은 정말로 쟤 때문에 마을을 떠나는 거 아니겠어? 그치만 왜? 너 혹시 나쁜 새니?

 

 , 물론, 나쁘다마다.”

 

 비아냥거리기는. 어쨌든 알아들었어. 나쁜 새라면 사실대로 대답해줄 리가 있겠느냐, 이 뜻인 거지? 하지만 착한 새는 그런 식으로 비꼬지 않을걸? 넌 나쁜 게 맞아. 못됐어.

 

 악마에게는 그만한 칭찬이 또 없지.”

 

 까마귀와 악마라, 그럴싸한 조합이기는 하네. 그치만 진짜겠어? 그런 건 전설 속에나 나오는 거고, 그래서 평범한 나랑은 인연이 없어. 기껏해야 퍼밀리어겠지. 쟤 주인은 검고 사악하면 멋있는 줄 아는 철부지 마법사일 거라고.

 

 악마? 너 그런 거 좋아하니? 보기보다 유치하구나?”

 고작 3개월 만에 애를 저렇게 배려놓다니. 감탄스럽구나, 로버트.”

 형이랑 아는 사이야?”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람. 형이 쟤 때문에 도망가는 거라면, 쟤도 형을 알겠지. 상대는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까마귀야. 자기가 쫓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멍텅구리는 아닐 거라고.

 

 알다마다. 나는 녀석과 친구니까.”

 

 역시나.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어줄 수는 없었다. 입으로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거니까.

 

 네 의견이야 어찌 되든 좋다.

 부정당한다고 해서, 진실이 거짓이 되지는 않으니.”

 

 말하는 게 약 오르네……. 엘케인은 반격을 가했다.

 

 형은 너 같이 재수 없는 애랑은 친구 안 해.”

 말이 심한걸. 과연, 피는 못 속여. 너도 만만치 않게 못돼먹었구나.”

 이젠 우리 엄마도 안다고 하게?”

 , 물론, 알다마다.”

 

 으휴, 어련하겠어. 됐다, 쓸데도 없는 입씨름은 여기까지만 하자. 지금 중요한 건…….

 

 하지만, 내가 말한 피는 그쪽이 아니다.”

 

 ……뭐라고?

 

 네가 아버지를 안다고?”

 

 순간 얼떨떨했다. 확대해석을 한 건 아닐까, 긴가민가하기도 했고. 그러나 앞서간 기대감이 엘케인의 입을 멋대로 움직였다.

 

 말해줘, 어떤 사람이야? 아니, 그 전에 이름부터! 그리고 생김새! 난 단서가 필요해!”

 글쎄.”

 제발, 머리글자만이라도!”

 

 잠깐, 내가 왜 까마귀 따위에게 휘둘리는 거지? 여기서 있었던 일은 무엇 하나 기억하지 못하는데 들은들 무슨 소용이 있다고?

 엘케인은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현실에서 엘케인만 한 소년이 이렇게 냉철할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만큼은 가능했다. 그리고 재차 생각했다. 아버지의 정보가 달린 일인 이상 신중해져야 했으니.

 몇 가지는 기억한다 치자. 저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나? 진실과 거짓을 분간할 방법은? 덮어놓고 믿어야 한다면, 그건 거짓이나 마찬가지야. 괜한 미련 갖지 말고 쫓아내야겠다.

 

 이 나쁜 새! 얼른 내 마음속에서 나가! 훠이, 훠이!”

 알겠다. 이만 가보도록 하지.”

 

 어라, 의외로 고분고분하네? 까마귀는 퍼드덕대며 날아올랐다. 엘케인의 머리 높이로.

 

 너도 그만 깨어나도록 해.”

 

 그리곤 이렇게 말하며, 이마를 쪼았다.

 

 

 오냐, 깬다, . 그까짓 독 내가…… ?”

 

 정신을 차려보니 숲 한복판에 멀뚱히 서 있다. 이상하군. 나는 분명히 엎어져……. !

 

 내 몸!”

 

 셀레나는 다급하게 팔다리를 이리저리 휘저어 봤다. , 똑바로 움직인다. 오직 내 의지만을 따라서.

 하지만 벌써부터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 이번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친 곳은 없나 찬찬히 확인해보자. 손으로는 만지고, 눈으로는 살피고. 좋다, 상한 데 하나 없이 멀쩡하다.

 이제 마지막, 주변을 두리번. 없다, 아무도.

 이건 이상하군. 정신 지배는 유효 범위가 짧은 것이 일반적. 시야 안에 술자가 있어야 할 텐데……. 하지만 그사이 기척도 없이 숨었다니, 그건 그것대로 말이 안 된단 말이지.

 

 설마하니 꿈이었다던가?”

 

 이건 말이 되지. 악몽을 동반한 몽유병을 유발하는 독이었던 거야.

 돌이켜보면 이 외진 숲에서 사람을 마주친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마인드 인챈터라니, 세상에 그런 우연이 어디 있겠어.

 , 놈이 로버트의 적이라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겠군. 아냐, 그게 더 이상해. 그러면 미행을 당했다는 건데, 둘 다 눈치를 못 챘다고? 그럴 수가 있나.

 역시 먹었던 풀떼기가 문제야. 아니면 그 포르말린인가 뭔가 하는 게 사실은 환각 버섯이었다던가.

 

 그보다, 도대체 얼마나 깊게 들어온 거지? 나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고?

 

 큰일이네. 숲은 길 찾기가 쉽지 않은데.”

 

 이렇게 중얼거리며, 셀레나는 재차 주변을 훑어봤다. 그러고 나니 한층 더 갑갑해졌다. 나무는 그놈이 그놈이요, 땅에는 풀만 빼곡하다. 사람이 다니는 길에 으레 있는 꺾인 나뭇가지도, 발걸음이 다져놓은 황톳길 레인도 없이 녹음만 짙었다.

 이러면 내가 온 길을 되짚어가야겠는데…… 젠장, 내가 남긴 발자취도 안 보이네. 이거 참, 욕지거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군. 마침 주변에 사람도 없겠다, 시원하게 질러나 보자.

 

 니미 싯팔, 도대체 뭘 먹어야 정신을 잃은 채로 숲을 싸돌아다니게 되는 거냐? 로버트 씹새브라운, 어디 한번 대답해 봐!”

 

 그러자 기대하지도 않은 회답이 왔다.

 

 「몸은 괜찮나?

 

 그것도 엉뚱한 사람의 엉뚱한 대꾸로.

 

 「예상보다 이르구나.

 제법이야. 마음에 드는걸.

 

 ……아니, 엉뚱하지 않아. 목소리가 귀에 익다. 꿈에서 만난 그 남자가 틀림없어. , 정정. 꿈이 아니었어, 그건.

 그보다 큰일이군. 어느 방향에서 난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어. 공격에 대비하려면 상대의 위치부터 파악해야 하는 건데, 이거 참 난감하게 됐구만.

 셀레나는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 역시, 뵈는 게 없군. 이거는 할 수밖에 없겠어, 그 말을.

 

 모습을 드러내!”

 

 들을 때마다 비웃었던 이 대사를 내가 하게 될 줄이야. 그때마다 네 목을 베어갈 때에나 그러지 않겠냐? 얼른 죽고 싶어서 그러는 거면 나타나 주고?’라고 속으로 뇌까렸다만, 혹시 모르지, 저쪽은 순순히 응해 줄지?

 

 「글쎄.

 

 , 기대도 안 했다. 그래도 대답씩이나 해주다니, 친절도 하셔라.

 그런데 이번에도 방향을 모르겠군. 앞이라고 생각하면 앞 같고, 뒤라고 생각하면 뒤 같은 이 기묘함……. 꼭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잖아.

 그러고 보니, 분명히 그런 마법이 있었지. 사람의 감각을 교란하는.

 

 「교란이랄 것까지야. 소리가 꼭 네 외부에서만 들려와야 한다는 법이 있던가?

 

 그렇다면 내 안? 젠장, 이미 뭔가를 당한 건가? 그래, 기습을 하면 했지, ‘나 여기 있소.’ 말부터 거는 멍청이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그럼 이제 어쩌지? 튈까?

 

 「보기보다 겁이 많은걸. 나를 경계할 필요는 없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난 또 조종당하고 싶지 않거든?

 

 「그건 합의가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에 지나지 않아.

 잘 생각해보도록 해. 네가 육체의 지배권을 빼앗길 정도로 정신력이 약한지를.

 

 엣흠, 그건 절대 아니지!

 

 「그러면, 다음 질문을 건네보도록 할까.

 내가 너에게 위해를 가한 적이 있나?

 

 ──! 그거참 기가 막힌 걸 묻는다. 나한테 사기 쳐서 몸 뺏어가 놓고, ? , 이 뻔뻔한 새꺄, 지금 장난해?

 

 「나는 널 도운 것이었는데. 잊었다고는 하지는 않겠지.

 마을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던 것을.

 

 ,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어쩌죠? 나는 내 몸을 빼앗아서 걸어가 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요? 등에 업든가, 어깨에 둘러메든가, 안아서 들든가! 하여튼 상식적인 방법으로 옮겨달라는 뜻이었는데요?

 

 「어쩌기는. 이미 걸어버렸는걸. 정 싫거든, 기절했던 장소로 돌아가겠나?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자세로 엎어져 눈을 감고, 서로 이러한 합의를 볼 수도 있겠지.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다.’

 

 개 같이도 비꼬는구만. 됐다, 입씨름은 그만하고 가련다. 우리 헤어지자. 질척거리기 없이 쿨하게.

 이별을 통보한 셀레나는 아무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방향 감각이 가관이로구나.

 너는 길치인가?

 

 정말이지, 사람 속 하나는 박박 잘도 긁는 놈이로군. 셀레나는 걸음을 멈추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모험가 경력이 몇 년인데 길치겠냐, ? 여기가 어딘지 모르니까 그러지!”

 

 「그런데도 일단 걷고 보는 건가?

 그런들 조난만 당할 뿐이다.

 

 가만히 있어도 똑같거든? 아니, 다르지. 무조건 조난이지! 걷는 건 리스크가 있지만 그만큼 리턴도 있고!”

 

 「과연, 지당한 말이로군.

 그렇다면, 이런 리스크를 감수해 보는 것은 어떻겠나?

 날 믿고, 따라가 보는 것이다.

 

 목소리가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까마귀가 나타났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양, 셀레나의 시선이 머무르던 방향에 버젓이.

 

 마인드 인챈터들은 저래서 싫다니까. 모습을 보일 거면 떳떳하게 진짜를 들이밀라고. 겁쟁이처럼 아바타나 내세우기는. 하기사, 금지된 마법을 다루는 너로서는 상판을 까기 겁나겠지. 잡히면 얄짤없이 사형인데.

 어쨌든, 누군지도 모르는 놈을 섣불리 믿을 수는 없어. 그게 마인드 인챈터라면 더더욱. 셀레나는 쏘아붙였다.

 

 너 같으면 쫓아가겠냐? 느개미가 낯선 사람은 따라가면 안 된다.’고 안 가르치던? , 혹시 아픈 곳을 찔렀다면 미안하게 됐고.”

 

 셀레나는 다시금 걸음을 뗐다. 방향은…… 몰라, 세상은 둥글댔으니까, 자꾸 걸어나가다 보면 만나겠지. 어쨌든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아.

 

 「그쪽이 아니래도.

 

 꺼지라니까?”

 

 「왜 날 그렇게까지 싫어하지?

 

 ? ───? 남의 대가리 속을 뒤적거리는 놈을 싫어하는 게 그리도 이상한가?”

 

 「선입견 때문이라는 거로군?

 

 늬들이 자초한 거야. 남의 생각 엿보기, 멀쩡한 사람 정신병자 만들기, 조종해서 강제로 자살시키기!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단 한 번도 한 적 없나!”

 

 「난 가슴도 손도 없는데. 다 줘버려서.

 

 , 내가 괜한 걸 물었네. 금지된 마법을 거리낌 없이 쓰는 놈인데, 양심이라는 게 남아 있을 리가 없지.”

 

 「금지,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하는군.

 너희들 인간에게 나를 처벌할 방법이란 없는데, 내가 왜 인간의 법도를 따라야 하지? 집행력이 없는 규칙은 존중할 가치도 없다.

 나를 벌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고, 따라서 나에게 제약을 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의지뿐.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하고 싶은 대로 막살겠다는 것이지.

 

 개똥철학 잘 들었다.”

 

 「로 정정해다오. 보다시피, 나는 까마귀이니까.

 

 ……지랄도 가지가지다.”

 

 …… 나 또 이러고 있네. 어휴, 좋다, 내가 한발 양보해 준다. 그놈의 길안내, 한번 해봐라. 따라줄 테니까.

 

 「이쪽으로.

 

 그렇게 말하면 내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목소리는 여전히 들려오는 방향이 가늠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향을 가리키기라도 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녀석이 말한 이쪽이 어디인지, 다른 그 어떤 방법보다도 명확하게 인지됐다. 뇌에 녀석의 생각이 쑤셔 넣어진 것 같달까. 그 낯설고 기괴한 감각을 좇아 셀레나는 몸을 돌렸다.

 

 어떻게……?”

 

 문득 의식 위로 떠 오른 직감이 셀레나에게 귀띔을 주었다. 다섯 마왕 전설, 그중의 두 번째에 의하면, ‘북쪽의 검은 마왕, 크라에스 미리어드 디아노이아역시 마인드 인챈터였다고. 그리고 그의 상징은 까마귀였다지.

 

 , 도대체 뭐 하는 놈이냐?”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나?

 

 아이고── 존엄하신 분을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근데 봉인 당하셨잖아요. 그러면 분수에 맞게 잠이나 퍼질러 자세요. 나 좀 그만 괴롭히고.”

 

 「괴롭힘이라니. 나는 너와 도움을 주고받고자 온 것인데.

 

 , 그러셔? 고맙기도 해라.”

 

 「네가 찾고 있는 그자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알고 있다. 거기로 안내하도록 하지.

 

 그거참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네. 근데 악마가 대가도 없이 남을 돕지는 않을 거 아냐? 뭘 바래? 말해 봐, 들어는 줄게.”

 

 「목숨.

 로버트 브라운.

 

 

 

━━Gemini, 망국의 왕자

 

 동네 아주머니들을 수군거리게 만든, 소문의 남자는 여관 앞을 배회하는 중이었다.

 키가 유달리 훤칠했다. 6피트 4인치. 호리호리하니 매끈하게 잘 빠진 체형이다. 또한 검은 머리카락에는 윤기가 돌았으며, 하얀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고왔다. 이런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귀한 용모.

 이 범상치 않은 남자를 무어라 부르면 좋을지는 누구도 몰랐다. 가명조차 밝힌 적이 없으므로.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자기네들끼리 멋대로 호칭을 정했다. ‘엘케인네 아버지’.

 근거? 쏙 빼닮은 얼굴.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다르고 분위기도 딴판에 나이는 아슬아슬하지만, 그래도 저런 외모가 흔하지는 않으니까.

 

 회색 눈동자를 살짝 덮은 눈꺼풀과 길게 내려온 속눈썹이 나른해 보였다. 반면에 눈매는 날카로웠고, 홍채 아래의 흰자가 드러난 삼백안은 싸늘했다.

 전체적인 선은 곱상하지만, 도드라진 눈썹 뼈와 곧게 뻗은 콧대에서만큼은 남성적인 면모가 엿보였다. , 동부의 피가 섞인 듯 이국적이기도 했다. 묘한 인상이다. 시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을 만큼. 기억에 아로새겨질 만큼.

 하지만 죽은 사람처럼 공허한 눈빛에는 음울함이 깊게 배어 있었다. 퇴폐적인 미모가 불러일으킨 순간의 호감이 재처럼 바스러질 만큼. 불길하다, 까마귀처럼.

 

 「까악 까악 깍, , 까악 까악, 깍 깍, 까악 깍, 깍 깍!

 

 그래, 까마귀…….

 

 「아직도 망설이는가?

 

 언제부터였을까. 저 악마가 내 머리를 깨고 나와 멋대로 까옥거리기 시작한 것은.

 

 「그만 결단을 내리는 편이 좋아.

 

 그 흉조는 저기 우물의 작은 지붕에 앉아있지만, 그곳에 까마귀는 없다.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됐다는 걸, 너도 알고 있지 않나?

 

 까마귀는커녕 아무것도. 그러니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누구의 것도 아니야. 헛것, 헛소리……. 청년은 귀를 막았다.

 

 「날 받아들이는 게 그렇게나 힘든가?

 전에도 말했지만, 부정한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리는 외부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유리 조각 같은 목소리가 가득히 들어있다. 그것들이 고막을 찢고 나와 활개를 치는 것이다.

 

 「너에게는 공존 외의 선택지가 없음을 잊지 않도록 해.

 

 대꾸하지 않을 수 없게끔.

 

 ……굴복이겠지.”

 

 「수평적인 관계는 싫어하나?

 

 닥쳐, 제발…….”

 

 「유감이군.

 

 이 말을 마지막으로 까마귀는 날아갔다.

 하지만 곧 돌아오겠지. 나의 육체를 빼앗으려는 계책을 꾸미고 있음을 나라고 모르지 않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그러니 내키지 않아도 해야만 한다. 내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주저할 시간조차도……. 끝내 청년은 말했다.

 

 마음을 정했습니다. 합시다, 지금.”

 

 우물에 가만히 걸터앉아 있었던 로버트에게. 정작 그는 난색을 표했지만.

 

 이크, 그건 제가 곤란한데. 저는 기왕이면 밤에 하고 싶거든요. 그래야 그림이 살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는 한차례 너스레를 늘어놓았다.

 

 상상해 보세요. 어둠 속, 빛이라고는 빨갛게 타오르는 불꽃뿐인 무대를, 그 위에 설 우리의 모습을. 제 얼굴은 역광 때문에 그늘이 졌는데, 그 와중에 눈동자만은 붉게 빛나는 거죠, 무시무시하게.

 저는 당신에게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갑니다, 위압적인 걸음걸이로. 당신은 그런 저를 향해 검을 겨누고요. 그렇게 우리 둘은 격돌, 결판을 짓습니다. 당신이 압승을 거둬도 좋고, 너 죽고 나 죽자 처절하게 싸워도 좋고.

 그렇다고 진짜로 죽이시면 안 됩니다! 제가 살아서 도망가야 긴장감도 시나리오도 이어지는 겁니다?

 아무튼, 당신이 멋진 모습으로 승리하고 나면 엘케인은 껌뻑 죽어있을 겁니다. 이제 대사 딱 한 줄만 치세요.

 내가 너의 형이다.’

 이러면 끝났죠. 13년이라는 세월이 만든 어색함? 섭섭함? 장담컨대 싹 녹아내립니다.

 그래서, 주연 배우님께서는 제 각본과 연출이 마음에 드시는지?”

 

 한결같이 제정신이 아닌 작자다. 그러나 저자의 손을 빌리는 것 말고는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밤이 오기를 기다리자는 터무니없이 한가한 소리를 해도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게 저쪽인 이상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청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해 떨어질 때까지 잠이나 잘까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으셨을 텐데, 여독 좀 푸세요. 지금 여관 비었거든요? 가서 아무 방이나 골라잡으시면 됩니다. 주인장은 자기 패거리들이랑 애 데리고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어서 걸릴 염려도 없어요.”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다……. 그래, 당신이라고 모를 리가 없지. 엘케인과 꼭 닮은 사람이 나타났다는 게 그들에게 얼마나 큰 위협인지를. 그걸 알면서도 늦장을 부리자는 네가 가증스럽다. 인간이 그리도 만만하단 말인가?

 

 안 들어가세요? 그럼 저 먼저 고릅니다? 나중에 바꿔달라 하기 없어요?”

 

 그러나 노려보기만 할 뿐이다. 선택지가 없으니까. 굴복 외에는…….

 

 「그래서, 낮잠을 자느라 놓친 아이는, 나더러 다시 찾아내라는 건가?

 날 부려 먹을 생각이나 하다니, 네 게으름은 여전하구나.

 

 들려온 목소리는 까마귀였다. 그것은 어느새 날갯짓도 없이 날아와 간판 걸이 위에 앉아있었다.

 

 크라에스! 어딜 그렇게 빨빨거리면서 다니다 이제 나타나요?”

 

 「어두우면 되는 건가?

 

 어라, 말을 돌리시네요? 몰래 이상한 짓이나 하다 왔나 봅니다? 그래도 전 이해해요. 악마에게도 욕구는 있으니까. 그 오랜 시간을 봉인…….”

 

 로버트의 말을 끊으며, 어둠은 적막과 함께 내려왔다. 그리고 외마디 감탄만이 홀로 마을을 가로질렀다.

 

 ──!”

 

 결코 길할 수 없는 징조에 주민들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스름의 한 가운데, 칠흑을 쏟아내며 일렁이는 검은 태양이 모두의 눈동자에 똑똑히 새겨졌다.

 낮에 찾아온 밤은 지나치게 일렀고, 이른 만큼 흉했다. 그러나 다섯 마왕 전설, 그중의 마지막 번째에 의하면 이러한 이변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본대륙 중부에서는 이보다도 짙은 암야가 수개월 동안이나 지속된 적이 있었다고 하니.

 하지만 설마 그럴 리가……. 그건 어디까지나 3백 년 전 과거의 일. ‘북쪽의 검은 마왕은 네 명의 용사, ‘워록, 에스프릿 이페르스’, ‘서머티지, 즈카르스 시엘’, ‘방랑 검객, 히란’, 그리고 마검사, 애쉬튼 반 레켈에게 패배해 육신을 잃은 지 오래란 말이다…….

 그럼에도 마을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실색했다. 누구는 비명을 질렀고, 누구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바들바들 떨었고, 누구는 가만히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렸다.

 

 「이제 만족스럽나?

 

 그래요, 분위기 최곱니다! 오늘 당장 세상이 망한다 해도 믿겠는데요?”

 

 그러나 저들에게 인간의 공포란 소소한 유락에 지나지 않으리. 로버트는 들뜬 목소리로 계속해서 지껄였다.

 

 그럼 당장 시작합시다! 자자, 당신…… , 우리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저는 로버트 브라운이라는 이름을 쓰는 중인데, 그쪽은?”

 

 그러면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청년은 그 뒤를 따르며 답했다.

 

 에반 세하르스.”

 그 이름을 쓰게요? 원주인에게 허락은 받은 겁니까?”

 

 「가명 정도는 나눠 쓸 수도 있는 것이지.

 

 하긴, 몸도 내줬는데 이름쯤이야.”

 

 방향은 광장. 어른 몇몇이 한데 모여 대책을 논하고 있었다. 로버트는 저들부터 솎아낼 생각이리라. 하지만…… 과연 그들만 죽고 끝날까?

 

 어쨌든, 세하르스 씨는…….”

 보비!”

 

 로버트의 말을 끊은 것은 에일렛이었다. 실루엣만으로 그를 알아보고는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아이고, 하늘이 왜 저런다니? 인제 1시밖에 안 됐는데 세상이 까매졌구나! 너는 마법사잖니. 뭐 아는 거 없니?”

 , 첫 번째 희생양 등장. 과연, 그녀의 정체는?”

 보비?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로버트는 손가락으로 에일렛을 가리켰다. 그러자 아낙네의 비명과 함께 화염이 솟아올랐다.

 

 , 불이…… 흐윽! 흐아아악──!”

 

──웬 비명소리가…….”

──, 사람이 탄다!”

 

 에일렛은 작열하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러나 맹화는 게걸스럽게 인간의 육신을 탐해갈 뿐.

 이윽고 비명조차 멎었다. 전신을 휘감은 화마에게 목이라도 졸린 듯이. 일렁이는 주홍빛 베일 너머로 보이는 표정만이 살려달라고 애원할 따름이다. 그러나 가망이 있을까. 사지와 몸통, 눈두덩과 입 구멍만 간신히 형체를 유지한, 뭉그러진 연홍색의 고깃덩이가 된 그녀에게.

 이제는 전신에 탄화가 일어났다. 뒤늦게 불꽃 속에 심지가 생겨난 것처럼, 그렇게 약초쟁이 에일렛은 죽었다.

 불길은 소사체가 바닥에 쓰러질 때의 충격으로 토막토막 쪼개지고 나서야 사그라졌다.

 

──…….”

 

 마을 주민들은 참혹함에 압도당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도망은커녕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가만히.

 모두가 넋 없이 지켜보는 가운데, 검은 시체 위로 새로이 작은 불꽃이 피어났다. 망자의 영혼이 홍염으로 거듭난 것이다.

 

 「미력한 영혼이로군.

 마력을 사용해본 적이 없는 자였어.

 

 그러게요. 역시 저 아주머니는 아니었나 봅니다.”

 

 「3개월이나 시간을 줬는데, 틀리면 안 되지.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죠.”

 

 「애초에 분별해 놓을 생각이 있기는 했나?

 

 어이쿠, 들켰…… 이 아니고! 제 딴에는 열심히 했거든요? 그런데 임무가 좀 어려웠어야죠? 계산을 해보세요, 크라에스. 저 혼자서 다 하려면 하루에 몇 명씩 뒷조사해야 하는지. 기한이 너무 촉박했다고요.”

 

 「, 물론, 그러셨겠지.

 

 아고, 안 믿는 눈치네……. 나 원 참, 우리 사이에 신뢰가 이렇게 부족해서야 어디 쓰겠습니까?”

 

 「하던 일이나 마저 하도록 해.

 

 늬예늬예, 알겠사옵니다, 폐하.”

 

 짓궂은 대답을 마친 로버트는 손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십여 대의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스으, 스스, 스스스…….

 

 그것들은 살아있었다. 붉은 비늘 사이로 이글거리는 불꽃을 토해내는 거대한 뱀. 로버트가 마력으로 빚어낸 괴물이었다.

 

 너희가 나 대신 수고 좀 해 줘.”

 

──쉬이이익……!

 

 화염의 뱀은 주인의 명령을 받들었다. 박제된 듯 그 자리에 붙박인 한 무리의 인간들을 노리고 매섭게 달려드는 것이다.

 

──흐아아악!”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을 주민들은 혼비백산하게 도망쳤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뱀의 허리는 바닥을 굽이치며 달렸고, 눈 깜짝할 사이에 먹잇감을 따라잡아 덮쳤다.

 

──치익…….

 

 흡수됐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지경으로 빠르게 사람이 녹아내렸다. 그러면서 뿜어져 나온 증기에는 살과 피 그리고 머리카락이 진득하게 눌어있었다.

 그 역한 냄새를 음미하듯 로버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 것이다.

 

 흐흐…… 또 허탕이네.”

 

 알고 있었다. 귀찮게 솎아내기를 할 바에는 몰살해버릴 작자라는 걸. 양심의 가책 따위는 없겠지. 오히려 즐기고 있겠지. 저들에게 인간이란 조잡한 장난감에 지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다른 묘안이 없었다. 엘케인은 아직 어렸다. ‘주변 사람들이 보인 애정과 친절 그리고 호의가 사실은 기만술에 지나지 않았다.’는 가혹한 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그래서 감춰야 했고, 그래서 악역이 필요했다. ‘일상을 앗아간 원수를 향한 원망과 증오를 대신 받아줄 사람이.

 엘케인을 기만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좋다. 그 뒤에 줄줄이 엮여 나올 또 다른 진실들을 틀어막기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하겠다.

 하지만 언제까지 감출 수 있을까. 만약 들킨다면, 엘케인은 어디까지 알게 될까? 혹시라도 나의 정체를,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아고, 애가 보면 어쩌려고 아직도 옆에 있어요? 얼른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숨으세요. 훠이, 훠이!”

 

 고뇌는 거기서 끊겼다. 그래, 당장은 벌여놓은 일에 집중함이 옳다. 고민은 엘케인을 구하고 난 다음으로 미루자. 에반은 로버트의 말을 따랐다.

 

 이따 크라에스가 신호 주면 그때 나오는 겁니다!”

 

 멀찍이 서서 가만히 관망하는 것이다. 이어질 참상을.

 

 오늘, 이 마을은 지도에서 사라지리라. 그리고 헐벗은 대지 위로 잿발만이 흩날릴지니.

 

 •

 •

 •

 

 ──!”

 

 부리가 어찌나 단단한지 눈앞은 핑 돌고 이마는 얼얼하다. 그러면 그렇지, 저 못된 새가 곱게 갈 리가 없지! 엘케인은 비죽 흘러나온 눈물을 훔치며 짜증을 내려고 했다.

 

 ! 으윽 으읍 으으읍?”

 

 그런데 이상하다, 나 왜 말을 못 하지? 몸도 안 움직여! 으아악, 까마귀가 나한테 저주를 걸었나 봐! 놀란 엘케인은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 으읍! 흐브윽!”

 

──방금 들었나? 엘케인이 낸 소리 같았는데.”

──그럴 수는 없소. 이렇게 빨리 풀릴 마법이 아니란 말이오.”

──혹시 모르니 확인하도록.”

 

 순서대로 니콜라스, 새뮤얼, 아델리나의 목소리였다. 그렇구나, 나 정신이 들었구나!

 말을 못 하는 건 입에 재갈이 물렸기 때문이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건 팔다리가 밧줄로 묶였기 때문이었어. 휴우, 진짜 저주인 줄 알고 식겁했네. 별일 아니어서 다행…….

 

 아니, 어떻게? 무슨 원리지?”

 

 ……이 아니지! 엘케인은 새뮤얼과 마주하고 나서야 현실 감각을 되찾았다. 나는 납치당했어!

 

──쓸데없는 걸 궁금해하는군. 새뮤얼, 애가 깨어났으면 다시 기절시키면 될 일이다.”

 

 하지만 원인을 규명해 예방하지 않으면 같은 일이 또…….”

 

──새뮤얼! 네가 여기에 마법을 연구하러 왔던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명령을 수행하라.”

 

 ……알겠습니다.”

 

 얼추 보이는 사물들의 실루엣이 눈에 익은 것을 보아 아직은 벨마 부인의 잡화점이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어디에서 깨어날지 모른다. 기절해서는 안 돼, 도망쳐야 해!

 

 흐브읍! ! 으읍!”

 

 엘케인은 발버둥 쳤다. 하지만 사지가 포박당한 상태로 저항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새뮤얼은 엘케인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그러자 또다시 눈앞이 하얘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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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거저서 거마어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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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토피아빌런
왜 닉값을 하지 않는거지?
RE 0
01/15 16:51
댓글은 자신을 나타내는 얼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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